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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폴 게티의 인생

안녕! Don이야.

 

요즘 브로커로 아이유, 강동원이 칸에 간 뉴스가 너무 많이 뜨더라고 거기에 보면 사진에 게티 이미지라고 보이지? 이 게티가 누군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고 해.

석유업의 시작

<어우, 아이유 넘나 예쁨>

 

1. 변호사였던 장폴게티의 아버지가 부실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오클라호마에 갔다가, 석유업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게티가의 패밀리비즈니스가 시작됐어.

 

2. 장 폴 게티(이하 게티)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불법과 편법의 사이를 줄타기하며 석유 사업을 크게 키웠지. 사실 뭐 석유의 제왕 존 록펠러(J. Rockefeller)도 그렇고, 미국의 초창기 석유업자는 깡패의 일이나 다름 없었어.

 

3. 평소 “석유는 야생동물과 같아서 먼저 잡는 자가 임자다.” “석유회사 주식을 살 바에는 가서 채굴을 해라.”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주식가격이 하락하자, “이건 채굴보다 주식이 더 싸겠군.”하며 석유회사 주식을 줍줍 하며 몸집을 키웠어.

 

4. 대공황이 생각보다 길어지자, 게티는 자신 회사의 종업원 전원을 해고시키고, 낮은 급료로 전원 재고용 하는 악행을 저지르기도 했지. (미국은 노동법도 없나 ㅋㅋㅋ)

컬렉션의 원조

5. 미술에 조예가 깊었으며, 미술품 수집에 관한 7권의 책을 썼어.

 

<수집의 즐거움. 장 폴 게티>

 

6. “가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을 싸게 사서, 절대로 되팔지 않는다.”가 그의 원칙이었고, 그가 구매한 예술품, 호텔, 빌딩, 회사, 가구 등등 한 번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 다시 나오는 법이 없었어.

 

진정한 존버랄까?

7.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치가 유태인을 잡아 죽이기 시작해. 1938년 게티가 이 소식을 듣고 전쟁의포화를 뚫고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 그의 목적지는 로스차일드 남작 저택이었다.

 

물론 유태인이었던 로스차일드 남작은 수용소로 이미 끌려간 뒤였고. 게티는 나치와 협상하여 저택에 남아있던 고가구와 미술품을 헐값에 사오지.

8. 이후에도 게티는 도굴에 가까운 유태인이 두고간 미술품 싹쓸이 쇼핑을 한다. 게티가 말년에 유럽의 미국 대사를 하고 싶어서 정치권에 전방위 로비를 하지만, 이 때 친나치 경력이 문제가 되어 매관magic에 실패해.

세계 1위 부자로 가는 길 

9. 전쟁이 끝나갈 무렵 많은 회사들이 사우디에서 배럴당 로열티를 몇 센트 주냐로 협상하고 있었는데, 폴 게티가 화끈하게 55센트를 불러 사업을 따오고… 업계 왕따가 되었어. (판 엎는 놈들이 제일 싫음)

 

10. 하지만 사우디 석유 시추 작업은 생각처럼 수월하지 못했고 1953년 3,000만달러를 썼지만 남은 유정은 5개 밖에 없었고.. 게티는 멘붕에 왔지.

 

11. 게티는 스트레스를 관리 하기 위해, 매일 저녁 자신의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면서 우울한 기분을 달랬대. 수입은 매일 수천-수백만불이었고, 지출란에는 신문 10센트, 버스 요금 5센트 등이 1달러 미만 소비가 전부였어. (우리도 아끼자)

 

12. 패색이 짙던 사우디 사업의 마지막 유정에서 기적적으로 기름이 나오고, 게티는 또 떼돈을 벌었어.

 

13. 마침내 게티는 1957년 포춘지 선정 미국에서 1위 부자가 되었으며, 미국 역사 사상 최초로 1억달러가 넘는 재산을 가진 사나이가 되었어.

 

14. 게티는 미국보다 영국이 물가가 싸다며, 런던 교외에 성을 짓고 왕처럼 살았는데, 손님 방에 전화비가 아깝다며 공중전화를 비치했지.

 

15. 호텔에서 숙박할 때 세탁서비스가 너무 비싸다며, 호텔 화장실에서 옷을 직접 빨았다. 메모지 앞 뒷면은 물론 여백이 없어질 때까지 썼다고.

 

16. 공연을 처음부터 본적이 없고, 후반전에 절반 값만 내고 보고. 정말 진상중의 진상이야…

 

15. 평생에 걸쳐 수 많은 여자들과 염문을 뿌렸으며 결혼을 5번했고, 5번째 결혼도 실패했어. 5번째 부인의 아들이 희귀병에 걸리자, 돈 많이 든다고 치료비 지불을 거절해버렸어. 아들은 곧 죽고 부인이 미친 싸이코패스라며 이혼을 요구하여 그의 5번째 결혼생활도 실패로 마무리.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납치사건

16. 손자 중에 한 명이 납치된 적이 있었는데, 이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서 영화로도 만들어졌어.

<장 폴 게티 손자 납치사건: 올 더 머니 2018년 개봉>

17. 손자가 13명 있었고, 그 중 1명이 이탈리아 마피아에게 납치됐다. 당시 세계 최고 부자의 손자가 납치되니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납치범들은 1700만 달러를 요구하였으나, 게티는 “그 새끼 싹수가 노랬어. 내 돈 뜯어 내려고 자작극 한 거야.”라고 믿지 않았다.

<얘네가 다 손자인데 납치범한테 돈 주기 시작하면 얘네 다 납치돼>

 

18. 마피아도 어이가 털려서 전보도 치고, 전화도 했으나 게티는 씹었다. 아들과 며느리가 아들 걱정에 초죽음이 됐는데도 게티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어.

 

마피아 : 야… 너 손자라니까? 너… 사람이냐?

며느리가 게티의 저택에서 납치범들과 전화해야 한다고 하자, 게티는 공중전화가서 하라고 해.

 

“아버님 납치범들과 전화해야 해요.”

 

“응 공중전화에서 해.”

 

“저 잔돈이 없는데요.”

 

“내가 바꿔줄께.”

 

19. 마피아가 손자의 귀를 잘라서 보낸 후에 게티는 그제서야 믿었는데 이번엔 “내가 손자가 13명인데 이거 몸값 주면, 나머지 12명도 납치된다.”고 뻐팅긴다. 마피아가 몸값을 깎아 줄 테니 달라고 애원하고, 결국 300만불에 몸값 합의를 봐.

 

마피아 : 몸 값 깍아줄게. 니 손자 데리고 가라 제발!

 

20. 게티가 돈 주려고 생각해보니 국세청 기부금 세액공제 한도가 220만불이라, 220만불만 줬다. 그리고 게티는 220만불 영수증 끊어서, 국세청에 세액공제 신청했다는 레전설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어. (받았는지는 모르겠음)

 

21. 여기서 장폴게티를 연기한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는 생전에 장폴게티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한다. 원래 장폴게티역을 케빈 스페이시가 연기했으나, 영화를 거의 찍어 놓고 성추문으로 매장되어, 폐기하고 다시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

말년과 죽음

22. 장폴 게티는 1976년 84년의 수전노의 삶을 마감했어.

<진정한 스크루지>

 

23. 그의 친구였던 베드포드 공작은 게티의 장례식에서 “폴을 생각하면 항상 돈이 생각난다.”라는 조사를 했고, 아마 죽은 게티는 이걸 최고의 칭찬으로 여겼을 듯 ㅋㅋㅋ

 

24. 게티가 죽은 후, 사람들이 ‘검소함과 절제’를 미덕으로 가르치는 미국 감리교의 영향으로, 감리교 신자였던 그가 이렇게 짠돌이가 된거 아니냐는 얘기도 있었는데 ㅋㅋ 감리교에서 공식 성명을 내고 난색을 표했다.

 

감리교 : 우리는 아껴쓰라는 거지 미친 수전노가 되라는 얘기가 아님.

 

25. 장 폴게티가 평생에 걸쳐 모았던 ㅋㅋㅋ 호텔에서 셀프 세탁하며 모은 돈ㅋㅋ 으로 산 예술품 컬렉션의 클라스는 무시무시했다. 어느 정도냐면 그의 컬렉션을 모아 LA에 장폴게티 미술관을 열었는데, 프랑스의 르브르, 로마의 바티칸, 뉴욕의 현대 미술관 등과 함께 세계 10대 미술관에 꼽힌다.

<장폴게티의 미술관>

26. 사실 게티 패밀리가 하는 비즈니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게티이미지(Getty image). 이 세상 모든 이미지가 있다는 그 게티이미지.

 

이 게티 이미지가 바로 그 게티야. 폴게티의 자손들이 하는 게티이미지. 앞으로 이미지에 getty images라고 써있으면 오늘의 폴게티를 한번 생각해봐!

 

<마지막은 팬심을 담아 Cathy가 좋아하는 BTS의 진으로 마무리>

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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